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⑲ 육탄 10용사 충용탑의 진실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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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탄 10용사 충용탑의 진실은 무엇일까?
●호국 정신을 기리는 통일공원
금촌에서 통일로를 따라 문산 방면으로 가다 보면 문산 초입에 오른쪽으로 통일 공원이 있다. 문산에 사는 사람이라면 잘 아는 곳이다. 문산 토박이로서 40대 중반 이후라면 아마도 이곳으로 소풍을 온 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파주 시민일지라도 금촌이나 운정 등에 살고 있다면 통일 공원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볼 수도 있겠다. 통일 공원은 역사 유적은 아니지만 현대사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매년 6월이 되면 1사단 장병들이 호국 영령을 기리는 추모 행사를 가지기도 한다.
통일공원이 조성되다
통일 공원은 제1보병사단(일명 전진부대) 장병들이 6·25 전쟁 때 문산 전투에서 희생된 선배들을 추도하기 위해 1973년 6월 25일 조성한 것이다. 공원을 조성하면서 전사한 장병들을 추모하는 충현탑을 세웠고, 공원의 이름을 통일공원이라고 명명하였다.
“붉은 무리 탱크를 앞세우고 임진강을 넘어 오던 날, 오직 죽음 하나로 지켰던 내 조국. 그 날의 사단이 4반세기의 성장 후에 주인으로 돌아와 통일의 지름길 위에 가신 님의 거룩한 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여기 공원을 조성하고 단을 세우다.”
비록 통일공원이라고 칭했지만 그 성격은 통일보다는 ‘호국’ 또는 ‘충성’의 의미가 더 많이 묻어나는 문구이다. 즉, 현충공원 또는 호국공원의 성격이 더 강하다.
종군기자 추념비가 세워지다
한편, 한국기자협회에서는 종군기자로서 6·25 전쟁의 참상과 전투 현황을 세계에 알리다가 순직한 기자들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고자 하였다. 협회는 기자들의 프레스센터가 있던 문산역이 내려다보이는 통일공원에 조성하기로 결정하고 전진부대의 동의를 얻었다.
“각하, 한국기자협회에서 종군기자 추념비를 세운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내가 휘호를 써 주지. ‘한국전 순직 종군기자 추념비’”
이렇게 해서 한국기자협회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를 이용하여 1977년 4월 27일 한국전 순직 종군기자 추념비를 설립하였다.
여러 가지 현충 시설이 들어서다
추념비에 기록된 기자는 국내외 모두 18명이었다. 파주의 봉서리 사람들은 18명의 종군기자를 기리기 위해 열여덟 그루의 잣나무를 심은 뒤, 마을 이름도 ‘열여덟 나무의 마을’이라고 바꾸었다. 그러나 이 마을 이름은 오래 가지 못해서 곧 잊혀졌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뒤에 통일 공원에는 제1사단 근무 중 큰 공훈을 세우거나 장병들의 호국정신을 기릴 수 있는 현충 시설이 들어섰다. 육탄 10용사 충용탑(1980), 이유중 대령 기념비(1981), 개마고원 반공유격대 위령탑(1987), 임광빈 중령 기념비(1989), 소위 김만술 상(1996), 살신성인 탑(2000) 등이 세워졌다.
육탄 10용사의 진실이 감추어지다
그중에서 육탄 10용사 충용탑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육탄 10용사는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남한과 북한이 38도선을 경계로 크고 작은 교전을 벌일 때 희생한 장병들로 알려졌다. 당시에 개성은 38도선 이남으로 남한 땅이었고, 송악산을 경계로 38도선이 지나갔다. 송악산의 여러 고지를 북한군에 빼앗긴 상황에서 10명의 장병들이 박격포탄을 안고 적의 기관총 진지에 몸을 던져 파괴함으로써 고지들을 탈환하였다. 그 후 국방부에서는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육탄 10용사’라 명명하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그런데 1964년 5월 4일 당시 연대장이던 사람이 사실과 반대되는 증언을 하였다.
“육탄 10용사는 〇〇〇가 자신의 친구가 총살을 당할까 봐 조작한 것입니다. 당시 10용사는 폭탄을 끌어안고 자폭한 것이 아니라, 길을 잃어서 북한군에게 포로가 된 것입니다. 오히려 제가 평양에 들어갔을 때 육탄 10용사라던 그들이 꽃다발을 안고서 웃는 사진을 보았습죠.”
그러나 이 증언은 무시되었다. 2003년에야 『6·25전쟁 참전자 증언록』 1권에서 공개되었다. 증언이 공개되었지만 국방부에서는 육탄 10용사의 무훈만이 진실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진실이 담긴 호국정신만이 가치 있다
육탄 10용사의 진실은 알 길이 없다. 당시에 육탄 10용사는 실제로 죽었거나 아니면 북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의 연대장이 거짓 증언을 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지휘관으로서 군의 사기를 위해 진실을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킬 수도 있다. 그런데도 조작된 것이라고 증언했다면 이는 진실에 가깝다. 증언자는 박정희 정부 때 중장까지 오른 인물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호국정신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조작되거나 거짓으로 포장된 호국정신은 불신을 조장할 수 있다.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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